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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디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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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르만 디트리히는 독일의 정치인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활동했다. 그는 1879년에 태어나 법학 등을 전공했으며, 바덴 대공국 정계에서 경력을 쌓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바덴주 주정부 외무장관을 역임하고 독일 민주당 설립에 참여했다. 1920년부터 1933년까지 국가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헤르만 뮐러 내각에서 식품농업장관을,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에서 부총리 겸 경제장관, 재무장관을 지냈다. 재무장관 재임 시 긴축정책을 펼쳤으며, 나치 집권 후에는 전권 위임법에 찬성했으나,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변호사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스위스로 망명했고, 종전 후 독일로 돌아와 자유민주당 창당에 관여했다. 1954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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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디트리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0년 모습
이름헤르만 로베르트 디트리히
출생일1879년 12월 14일
출생지독일 제국 바덴 대공국 엘차흐
사망일1954년 3월 6일
사망지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슈투트가르트
정당독일 민주당 (1918~1930)
독일 국가당 (1930~1933)
자유민주당 (1948년 이후)
직업정치인
정치 경력
소속 정당독일 민주당
의회 의원라이히스타크 의원 (1920년-1933년)
선거구전국구 (1932년-1933년)
바덴 (1920년-1932년)
주요 직책
부총리임기 시작: 1930년 3월 30일
임기 종료: 1932년 6월 1일
총리하인리히 브뤼닝
전임오스카르 헤르크트 (1928년)
후임프란츠 폰 파펜 (1933년)
재무장관
국가 재무장관임기 시작: 1930년 6월 26일
임기 종료: 1932년 6월 1일
총리하인리히 브뤼닝
전임하인리히 브뤼닝 (대행)
후임요한 루트비히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경제 장관
임기 시작1930년 3월 30일
임기 종료1930년 6월 26일
총리하인리히 브뤼닝
전임로베르트 슈미트
후임에른스트 트렌델렌부르크
식량농업부 장관
임기 시작1928년 6월 28일
임기 종료1930년 3월 27일
총리헤르만 뮐러
전임마르틴 실레
후임마르틴 실레

2. 생애

헤르만 디트리히는 1879년 12월 14일 바덴 대공국 엘차흐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뢰라흐의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슈트라스부르크, 바젤, 괴팅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법학, 경제학, 역사학을 공부했다. 1905년 바덴 대공국의 2급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카를스루에오펜바흐 관공서에서 잠시 근무했다.

1906년 카를스루에 시의원에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08년에는 시장, 1911년에는 바덴 대공국 의회 의원, 1914년에는 콘스탄츠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독일 제국이 붕괴되고 바덴 대공국이 바덴주로 개편되면서, 디트리히는 바덴주 주의원에 당선되어 주정부 외무장관을 맡았다. 동시에 독일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바덴주 지구당 의장을 역임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 재선 당시, 디트리히는 "너무 좌파적"이라는 이유로 대통령 후보 캠페인에서 연설이 금지된 몇 안 되는 내각 구성원 중 한 명이었다.[3]

2. 1.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1920년 총선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처음으로 국가의회 의원에 당선된 후 1933년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1928년 헤르만 뮐러를 총리로 한 대연정 내각에서 식품농업장관을 맡으면서 처음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장관직에 올라섰다.

1930년 들어선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에서 부총리 겸 경제장관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 파울 몰덴하워가 재무장관에서 물러나자 브뤼닝은 후임 장관에 자신을 임시로 임명한 후 며칠 뒤 디트리히를 임명했다. 같은 해 민주당이 독일 국가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구성된 당 지도부에서 초대 당 의장으로 선출됐다. 재무장관으로 지내면서 긴축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실업자를 대거 양산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대공황의 한가운데서, 디트리히는 실업률의 급격한 증가를 상쇄하기 위해 1930년에 정부 계약의 "주요 지지자"가 되었다. 계약이 가격 인하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임시 국가 경제 평의회와 함께 독일 산업계의 임금 삭감을 승인해야 했다.

디트리히는 경제학자 하인리히 브뤼닝, 아담 슈테거발트와 함께 독일의 산업 능력을 희생하면서 농업 부문의 속도를 가속화하는 것이 실업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1932년 브뤼닝 내각이 해체되자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브뤼닝 이후로 총리에 올라선 프란츠 폰 파펜아돌프 히틀러를 강하게 비판했다.

2. 2. 나치 집권과 제2차 세계 대전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에서 부총리 겸 경제장관에 임명되었다. 1930년 6월 파울 몰덴하워가 재무장관에서 물러나자 브뤼닝은 후임 장관에 자신을 임시로 임명한 후 며칠 뒤 디트리히를 임명했다. 같은 해 독일 민주당이 독일 국가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구성된 당 지도부에서 초대 당 의장으로 선출됐다. 재무장관으로 지내면서 긴축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실업자를 대거 양산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32년 브뤼닝 내각이 해체되자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브뤼닝 이후로 총리에 올라선 프란츠 폰 파펜아돌프 히틀러를 강하게 비판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전권 위임법이 발의되자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국가당 동료들을 나치당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찬성으로 선회했다. 그러나 법안 통과 후 국가당은 나치당에 의해 해산됐다.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베를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보덴호 근처의 알렌스바흐로 이주했다. 7·20 음모가 터지기 전에 카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와 접촉했는데, 암살 시도가 실패하자 당국으로부터의 체포를 걱정해 1944년 8월 스위스로 망명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는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2. 3. 전후 활동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독일로 돌아와 미군·영국군 점령 지구에서 식품농업국장을 맡았으며, 자유민주당 창당에도 관여했다. 1954년 3월 6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사망했다.

3. 정치적 입장 및 평가

디트리히는 1930년에 파울 몰덴하우어의 뒤를 이어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무부 장관이 되었다. 대공황 와중에 디트리히는 급격히 증가하는 실업률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 계약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러나 계약 조건이 가격 인하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임시 국가 경제 평의회와 함께 독일 산업계의 임금 삭감을 승인해야 했다.[2]

디트리히는 경제학자 하인리히 브뤼닝, 아담 슈테거발트와 함께 농업 부문의 성장을 가속화하고 독일 산업 능력을 희생하는 것이 실업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재선 과정에서, 디트리히는 "너무 좌파적"이라는 이유로 대통령 후보 캠페인 연설이 금지된 몇 안 되는 내각 구성원 중 한 명이었다.[3]

참조

[1] 학술지 'He served the German people well'. Der politische Weg Hermann Dietrichs vom badischen Nationalliberalen zum baden-württembergischen Freidemokraten
[2] 서적 The Rise and Fall of Weimar Democracy UNC Press Books 1998-03-01
[3] 서적 The Rise and Fall of Weimar Democracy UNC Press Books 1998-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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